이정태 숲해설가가 읽어주는 ‘자연의 지혜’
뙤약볕이 새겨 넣은 황금빛 줄무늬, 참외가 가르쳐 준 '가장 낮게 자라는 법'
봄날의 앵두와 복숭아가 나뭇가지 위에서 화사함을 뽐내고 간 자리에, 대지가 본격적인 가마솥더위로 들끓기 시작할 때, 높은 하늘 대신 메마른 흙바닥에 온몸을 바짝 붙인 채 홀로 눈부신 황금빛 얼굴을 드러내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참외입니다.
"진짜 오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처럼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여름철 갈증을 달래주던 참외는, 타오르는 태양의 열기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제 안의 달콤한 과즙으로 정제해 내는 지혜로운 들풀이지요. 오늘은 남들처럼 높이 솟구치려 하기보다,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단단한 결실을 가꾸어가는 참외의 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눈보다 마음으로 먼저 품어 안는 ‘소박(素朴)’의 신비
참외는 눈으로 그 선명한 노란빛을 마주하기 전에, 시골 원두막 아래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달콤하고 싱그러운 향기로 우리의 마음을 먼저 포근하게 품어 안는 식물입니다. 화려한 온실 속의 과일들처럼 고고하진 않지만, 거친 밭고랑 사이에서 대지의 정기를 정직하게 채워내지요.
왕실의 제사상에 오르던 귀한 오이, 첨과(甛瓜), 한방과 옛 문헌에서는 참외를 ‘첨과’ 즉, 단맛이 나는 오이라 불렀습니다. 삼국시대 전부터 우리 땅에서 자란 토종 과일로, 조선 시대에는 왕실의 제사상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과일로 대접받았지요. 복숭아가 신선의 불로장생을 품었다면, 참외는 가장 친근한 흙바닥에서 인간의 갈증을 다정하게 해소해 온 셈입니다.
지친 몸을 깨우는 천연 이온음료, 참외는 뜨거운 여름철, 땀을 많이 흘려 수분과 비타민이 고갈된 인간에게 완벽한 처방전입니다. 몸의 열을 내려주고 갈증을 멎게 하며, 풍부한 칼륨과 엽산이 들어있어 지친 몸의 기운을 북돋아 주지요. 산삼이 깊은 어둠 속에서 영약을 빚었듯, 참외는 뜨거운 햇살 아래서 가장 시원한 치유의 성분을 길러냈습니다.
낮은 곳을 지키는 푸른 이정표, 소나무가 높은 산 위에서 우직한 기개를 보여준다면, 참외는 넝쿨을 뻗어 거친 흙바닥을 온통 초록색으로 덮어주며 "가장 낮고 척박한 자리일지라도 나는 여기서 나만의 황금빛 축제를 열겠다"는 자연의 약속을 묵묵히 실천해 냅니다.

‘바닥에 엎드릴수록 더 달콤해진다’ 참외의 생존 미학
참외는 왜 다른 유실수들처럼 단단한 줄기를 키워 하늘로 솟구치지 않고, 굳이 가녀린 넝쿨을 길게 뻗어 흙먼지 가득한 바닥을 기어 다니며 살아갈까요? 여기에는 여름날의 거센 태풍과 비바람 속에서도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결실을 완벽히 지켜내려는 참외만의 영리하고 단단한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바람을 이기는 가장 낮은 자세, 넝쿨의 지혜, 참외는 줄기를 키우는 대신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한여름에 불어닥치는 거센 태풍과 소나기에 높은 나무들은 가지가 부러지고 열매가 떨어지지만, 참외는 대지에 몸을 밀착해 그 모진 바람을 머리 위로 흘려보내지요. 주어진 위기를 유연하게 받아 넘기는 영리한 생존법입니다.
시련이 새겨 넣은 하얀 이정표, 참외를 자세히 보면 노란 바탕에 하얀 줄무늬가 곧게 뻗어 있습니다. 이 골은 뜨거운 햇살 아래서 열매가 터지지 않고 균형 있게 자라나도록 숨통을 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뜨거움을 거부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여, 도리어 자신을 성숙하게 만드는 찬란한 훈장으로 삼은 역발상의 미학입니다.
기다림 끝에 완성되는 ‘황금빛 미소’
많은 사람이 참외를 노란 열매로만 기억하지만, 참외는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 짙은 초록색 잎사귀 아래에 앙증맞고 순박한 노란색 꽃들을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피워냅니다. 그리고 그 소박한 꽃이 진 자리에, 비로소 태양의 열기를 고스란히 머금은 황금빛 비상을 완성하지요.
거친 흙바닥 위에서 노란 얼굴을 반짝이며, “삶이 당신을 가장 낮은 곳으로 밀어 넣고 외롭게 만들지라도 낙심하지 마세요. 줄기를 키우느라 힘을 낭비하기보다, 묵묵히 내면의 과즙을 채워간다면 당신이 피워낼 인내의 결실은 그 누구보다 시원하고 달콤할 테니까요”라고 우리를 나직이 위로하는 듯합니다.
참외의 꽃말은 ‘성숙,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그늘 한 점 없는 땡볕 밑에서도 기죽지 않고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내어, 기어이 인간을 살리는 시원한 영양분을 채워내는 참외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단한 난관들과 땀방울의 시간들도 결국 우리 내면의 열매를 가장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드는 소중한 축적의 과정일 것입니다. 지금 혹시 내 힘으로 버티기 힘든 현실의 폭염 속에서 마음이 지쳐 계신가요?
단단한 흙바닥을 뚫고 일어나 기어이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황금빛 결실을 피워내는 참외처럼, 여러분의 묵묵한 인내와 성실함도 조만간 거친 현실을 깨우고 주변을 환하게 미소 짓게 할 찬란한 봄날의 결실을 이뤄낼 것입니다.
대전 도안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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