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태 숲해설가가 읽어주는 ‘자연의 지혜’
허공을 가르는 투명한 십자가, 잠자리가 가르쳐 준 '완벽한 균형의 미학'
봄날의 참새가 조잘대며 아침을 열고, 뜨거운 여름날 매미가 땅속의 침묵을 깨뜨리며 숲을 온통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뒤, 계절이 슬며시 황금빛 가을로 방향을 틀기 시작할 때, 아무런 소리도 없이 가장 완벽하고 우아한 날갯짓으로 푸른 하늘을 수놓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잠자리입니다.
"살아있는 헬리콥터", "하늘의 사냥꾼"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답게 잠자리는 인류의 가장 진보된 항공 공학조차 완벽히 모방할 수 없는 신비로운 비행 능력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비행 뒤에는 맑은 물과 공기를 찾아 먼 길을 떠나는 연약한 생명의 숭고한 여정이 담겨 있지요. 오늘은 소리 없이 세상의 중심을 잡고 유연하게 허공을 딛고 서는 잠자리의 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귀보다 마음으로 먼저 품어 안는 ‘정적(靜寂)’의 신비
잠자리는 매미처럼 시끄러운 울음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맑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혹은 호숫가의 잔잔한 수면 위로 그림자처럼 미끄러지듯 날아가며 우리의 마음에 고요하고 평화로운 가을의 정취를 먼저 품어 안는 곤충입니다. 화려하게 울어대는 곤충들 사이에서 침묵의 언어로 세상을 지배하는 셈이지요.
물과 하늘을 이어주는 맑은 정령, 청령(蜻蛉), 옛 선조들은 잠자리를 '청령'이라 불렀습니다. 맑은 물(수채)에서 태어나 맑은 하늘(창공)로 날아오르는 생태적 특징을 그대로 담은 아름다운 이름이지요. 매미가 어둠 속에서 고결한 인내를 벼려냈다면, 잠자리는 투명한 물속에서 세상을 직시할 가장 맑고 커다란 두 눈을 완성해 낸 셈입니다.
인간을 돕는 소리 없는 익충, 어린 시절 잠자리를 잡아보며 놀았던 추억 때문에 그저 연약한 곤충으로 보이지만, 사실 잠자리는 파리나 모기 같은 해충을 하루에 수백 마리씩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사냥꾼이자 고마운 익충입니다. 농부들에게는 해충을 줄여주는 다정한 조력자이며, 생태계에서는 모기 개체 수를 조절하는 완벽한 파수꾼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투명한 이정표, 고추잠자리가 꼬리를 붉게 물들이며 무리 지어 하늘을 맴돌기 시작하면, 비로소 무더웠던 여름이 끝나고 청명한 가을이 다가왔음을 깨닫습니다. 참새가 일상의 정겨운 이정표라면, 잠자리는 거대한 계절의 순환을 우리 눈앞에 가장 아름답게 그려 보여주는 살아있는 달력입니다.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고, 멈춤을 안다’ 잠자리의 생존 미학
잠자리는 왜 다른 곤충들처럼 커다란 날개로 바람을 일으켜 무작정 앞으로 돌진하지 않고, 굳이 투명하고 가느다란 네 장의 날개를 따로따로 움직이며 때로는 정지 비행(호버링)을 하고, 심지어 뒤로 날아가는 기묘한 비행술을 발전시켰을까요? 여기에는 복잡한 자연의 변화 속에서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며 삶의 주도권을 쥐려는 잠자리만의 치밀하고 단단한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멈춤으로 속도를 지배하는 호버링의 지혜, 잠자리는 공중에 완벽히 정지해 있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쉴 새 없이 날개를 지쳐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가만히 멈춰 서서 거대한 겹눈으로 사방을 360도로 관찰합니다. 바쁘게 쫓아가기보다 잠시 멈추어 서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가장 정확한 순간에 번개처럼 낚아채는 통찰과 속도의 미학입니다.
네 장의 날개가 만드는 완벽한 조화, 잠자리의 앞날개와 뒷날개는 각각 독립적인 근육으로 움직입니다. 한 쌍이 올라갈 때 다른 한 쌍은 내려가며 공기의 와류(소용돌이)를 절묘하게 이용하지요. 혼자만의 힘으로 무리하게 바람을 이기려 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날개들을 유기적으로 조화시켜 가장 적은 에너지로 가장 효율적인 비행을 완성하는 영리한 생존법입니다.
기다림 끝에 비상하는 ‘투명한 가을의 춤사위’
많은 사람이 잠자리를 가을 하늘의 잠시 머무는 손님으로만 기억하지만, 잠자리 역시 유충(수채) 시절에는 깊고 탁한 물속에서 거친 물살을 견디며 자신을 벼려내는 인고의 시간을 거칩니다. 물속의 무거운 껍질을 벗어 던지고, 젖은 날개를 말려 기어이 찬란한 태양 빛 아래 투명한 십자가를 긋어 내릴 때, 그 비행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완벽한 승리의 춤사위가 됩니다.
가을 하늘에 붉은 꼬리를 흔들며, “삶이 너무 빠르고 어지럽게 흘러간다고 느껴질 때는 무작정 앞으로만 나아가려 하지 마세요. 공중에 멈추어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잠자리처럼, 때로는 잠시 멈춤을 통해 나의 중심을 잡고 완벽한 균형을 찾는다면, 당신의 비행도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정확한 궤적을 그리게 될 테니까요”라고 우리를 나직이 위로하는 듯합니다.
잠자리의 상징은 ‘멈춤과 비상, 완벽한 균형, 그리고 맑은 통찰력’입니다.
거센 바람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허공에 멈춰 서서 제 몫을 다하는 잠자리처럼, 우리 삶에 찾아오는 혼란과 방황의 시간들도 결국 우리 내면에 가장 단단한 균형 감각을 채워 넣는 소중한 축적의 과정일 것입니다. 지금 혹시 너무 빠른 현실의 속도에 지쳐 나만의 중심을 잃고 흔들리고 계신가요?
어두운 물속을 벗어나 기어이 가장 투명하고 자유로운 날갯짓을 지쳐 나가는 잠자리처럼, 여러분의 묵묵한 멈춤과 성찰의 시간도 조만간 거친 현실을 깨우고 푸른 하늘을 활기차게 수놓을 찬란한 결실을 이뤄낼 것입니다.
대전 도안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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