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이야기

장벽을 넘어 펼치는 초록의 연대, 담쟁이가 건네는 위대한 동행

이모 저모 2026. 6. 10. 22:45

이정태 숲해설가가 읽어주는 ‘자연의 지혜’

장벽을 넘어 펼치는 초록의 연대, 담쟁이가 건네는 위대한 동행

매화와 버드나무가 지나간 자리에 이팝나무가 한바탕 눈꽃을 피우고 나면, 도심의 메마른 콘크리트 벽과 삭막한 담장 위로 소리 없이 초록빛 물결을 밀어 올리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담쟁이(담쟁이덩굴)입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회색 벽을 온통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채워가는 담쟁이는, 예로부터 절망의 벽을 희망으로 바꾸는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늘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벽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서로 손을 맞잡고 나아가는 담쟁이의 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물 한방울 없는 삭막한 담벽을 기어올라가는 담쟁이 덩굴입니다.


눈보다 마음으로 먼저 품어 안는 ‘상생(相生)’의 신비
담쟁이는 눈으로 보기 전에 그 가슴 벅찬 생동감으로 우리의 마음을 먼저 따뜻하게 품어 안는 식물입니다. 메마르고 거친 벽에 단단히 몸을 붙이고 기어이 하늘을 향해 한 뼘씩 영토를 넓혀가는 모습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가치를 가르쳐 줍니다.

나무를 타고 오르는 석벽등(石壁藤), 한방에서는 담쟁이를 '돌과 벽을 타는 덩굴'이라는 뜻으로 '석벽등'이라 부르며, 당뇨와 어혈을 다스리는 귀한 약재로 썼습니다. 거친 환경에서 자라난 만큼 그 속에 품은 생명의 기운도 지극히 단단한 것입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초록 커튼, 담쟁이는 단순히 벽을 가리는 풀이 아닙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콘크리트 벽의 온도를 낮춰주는 천연 에어컨 역할을 하고, 도심의 소음과 먼지를 흡수하는 고마운 방패막이가 되어줍니다.

가을날의 붉은 열정, 봄과 여름에는 싱그러운 초록으로 눈을 맑게 하지만, 가을이 깊어지면 그 어떤 단풍나무보다 정열적인 붉은 빛깔로 온 벽을 물들입니다. 묵묵히 버텨온 시간의 끝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축제를 펼쳐 보이는 것이지요.
 

가을이 되면 이렇게 아름다운 단풍이 됩니다.


‘장벽은 디딤돌일 뿐이다’ 담쟁이의 생존 미학
담쟁이는 왜 다른 덩굴식물들처럼 부드러운 흙바닥에 안주하지 않고, 굳이 단단하고 척박한 수직의 벽을 선택해 올라갈까요? 여기에는 절망적인 환경을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삼는 담쟁이만의 치밀한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개구리발을 닮은 흡착근(吸着根)의 지혜, 담쟁이에게는 덩굴손 끝에 작은 흡반(빨판)이 달려 있습니다. 마치 개구리 발가락처럼 생긴 이 '흡착근'은 거친 시멘트벽이나 바위 표면을 아주 미세하게 파고들어 절대 떨어지지 않는 강력한 지지대를 만듭니다. 남들이 갈 수 없다고 포기한 수직의 벽을 자신만의 무기로 디딤돌 삼아 올라가는 영리한 생존법입니다.

한 뼘씩, 다 함께 나아가는 연대, 도종환 시인의 시(詩)처럼, 담쟁이는 한 송이가 앞장서면 수천 송이가 말없이 이끌고 따르며 그 벽을 넘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기지개 키듯 잎을 펼치며 서로의 손을 잡고 나아가는 연대의 힘이야말로 담쟁이가 거대한 장벽을 정복하는 비결입니다.

기다림 끝에 완성되는 ‘푸른 기적’
담쟁이는 처음에 아주 작은 한 줄기로 시작합니다. 도저히 채울 수 없을 것 같던 거대한 회색 벽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느새 빈틈 하나 없이 푸른 융단으로 가득 차게 되지요.
거친 벽에 온몸을 바짝 밀착한 채 바람에 흔들리며 아무리 높은 장벽이 가로막아도 포기하지 않고 함께 걸어가면 결국 넘어설 수 있습니다. 라고 우리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듯합니다.

담쟁이의 꽃말은 ‘아름다운 매력, 우정’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친구가 되어 장벽 위로 아름다운 생명의 기적을 일구어내기 때문입니다.
가장 메마른 벽에서 가장 눈부신 초록의 파도를 만들어내는 담쟁이처럼, 우리 삶을 가로막는 크고 작은 난관들도 결국 우리를 더 단단하게 묶어주고 성장시키는 무대가 될 것입니다. 지금 혹시 눈앞에 마주한 거대한 벽 앞에서 막막해하고 계신가요?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손을 맞잡으며 기어이 벽을 넘는 담쟁이처럼, 여러분의 굽히지 않는 인내와 노력도 조만간 단단한 현실을 뚫고 푸른 희망의 영토를 활짝 넓혀갈 것입니다.
 
 

대전 도안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