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태 숲해설가가 읽어주는 ‘자연의 지혜’
눈을 감아도 가슴에 번지는 향기, 라일락이 건네는 보랏빛 추억
매화와 버드나무가 지나간 자리에 파릇한 새싹들이 돋아나고 온 세상이 완연한 봄의 한가운데로 접어들 때, 골목길 모퉁이나 작은 정원 한구석에서 코끝을 스치는 진하고 달콤한 향기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라일락입니다.
보라색과 하얀색의 자잘한 꽃송이들이 뭉쳐 피어나는 라일락은, 예로부터 향기로 먼저 봄의 절정을 알리는 서정적인 나무였습니다. 오늘은 화려한 크기나 모양보다 깊고 진한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증명하는 라일락의 지혜와, 그 속에 담긴 첫사랑 같은 따뜻한 격려를 나누고자 합니다.

눈보다 마음으로 먼저 품어 안는 ‘향기(香氣)’의 신비
라일락은 눈으로 보기 전에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퍼지는 달콤한 향기로 우리의 마음을 먼저 포근하게 품어 안는 나무입니다. 길을 걷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라일락 향을 맡으면, 누구나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아련한 추억과 설렘을 떠올리게 되지요.
수수이삭을 닮은 우리 꽃, 수수꽃다리, 라일락의 우리 이름은 '수수꽃다리'입니다. 가을에 여무는 곡식인 '수수'의 이삭처럼 꽃들이 몽글몽글 무리 지어 달린다고 하여 붙여진 정겨운 이름이지요. 서양에서 온 라일락만큼이나 우리 고유의 수수꽃다리 역시 깊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습니다.
세계인을 사로잡은 미스김 라일락, 우리가 흔히 정원에서 만나는 향이 유독 진한 라일락 중에는 '미스김 라일락'이라는 품종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털개회나무 씨앗이 미국으로 건너가 개량된 것인데,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라일락이 되었지요. 척박한 바위틈에서 자라던 강인한 유전자가 꽃 피워낸 자랑스러운 우리 식물의 역사입니다.
마음을 치유하는 향기 요법, 라일락의 진한 향기는 실제로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지친 마음을 안정시키는 진정 효과가 뛰어납니다. 꽃잎을 바라보는 즐거움에 더해, 보이지 않는 향기로 사람들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 주니 참으로 다정한 나무입니다.
‘작은 꽃들이 모여 거대한 향기를 만든다’ 라일락의 생존 미학
라일락은 왜 장미나 양귀비꽃처럼 커다랗고 화려한 꽃송이를 하나씩 피우지 않고, 쌀알만 한 작은 꽃들을 수백 개씩 뭉쳐서 피울까요? 여기에는 숲의 경쟁 속에서 벌과 나비를 유도하고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라일락만의 영리한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뭉쳐야 산다, 연대(連帶)의 미학, 라일락의 꽃 한 송이는 아주 작고 연약합니다. 홀로 있으면 넓은 숲속에서 쉽게 묻히고 말겠지요. 하지만 라일락은 수많은 작은 꽃들이 촘촘하게 손을 맞잡아 하나의 커다란 꽃방망이를 만듭니다. 담쟁이가 서로 연대하여 벽을 넘듯, 작은 힘을 모아 큰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지혜입니다.
향기를 증폭시키는 영리한 선택, 꽃송이가 모여 있는 만큼, 그 속에 품은 향기 주머니도 수백 배로 늘어납니다. 작은 꽃들이 일제히 향기를 뿜어내어 멀리 있는 꿀벌들에게 "여기 달콤한 꿀이 있어요" 하고 확실한 이정표를 제시하는 지극히 효율적이고 내실 있는 생존법입니다.

기다림 끝에 터지는 ‘달콤한 축제’
라일락은 가을과 겨울 동안 거칠고 메마른 나뭇가지 끝에 아주 작고 단단한 겨울눈을 맺은 채 혹한을 버텨냅니다. 그리고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대지를 채우는 순간, 웅크렸던 꽃망울을 일제히 터뜨리며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보랏빛 축제를 시작합니다.
바람에 달콤한 향을 실어 보내며, “비록 지금은 작고 눈에 띄지 않을지라도, 당신의 내면에 쌓인 가치와 매력은 머지않아 세상 가장 향기로운 모습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라고 우리를 나직이 응원하는 듯합니다.
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 젊은 날의 추억’입니다.
처음이라 서툴렀지만 가장 순수하고 진했던 그 시절의 마음처럼, 라일락은 가장 진실한 향기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작은 꽃송이들이 모여 온 동네를 향기로 물들이는 라일락처럼, 우리 삶의 소소한 노력과 작은 행복들이 쌓여 결국 인생이라는 커다란 정원을 아름답게 채우게 될 것입니다. 지금 혹시 내가 하는 일이 너무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 조급해하고 계신가요?
단단한 겨울눈을 뚫고 기어이 달콤한 향기를 온 세상에 퍼뜨리는 라일락처럼, 여러분의 묵묵한 인내와 성실함도 조만간 단단한 현실을 깨우고 주변을 환하게 미소 짓게 할 찬란한 결실을 틔워낼 것입니다.
대전 도안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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