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태 숲해설가가 읽어주는 ‘자연의 지혜’
눈보라 속에 피어나는 붉은 보석, 남천이 건네는 따뜻한 온기
화려했던 봄날의 라일락과 한여름의 수국, 그리고 가을을 빛내던 국화마저 모든 소임을 다하고 떠난 겨울의 길목, 만물이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고 차가운 눈보라가 대지를 몰아칠 때 홀로 불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붉은빛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남천입니다.
사계절 내내 변함없는 푸름을 보여주는 소나무가 겨울의 우직한 기개를 상징한다면, 남천은 가장 추운 계절에 가장 뜨거운 붉은빛을 발하며 겨울 정원의 차가운 공기를 따스하게 녹여주는 다정한 나무이지요. 오늘은 혹독한 겨울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붉은 열정을 가꾸어가는 남천의 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눈보다 마음으로 먼저 품어 안는 ‘길상(吉祥)’의 신비

남천은 눈으로 보기 전에 하얀 눈밭 위로 떨어지는 붉은 실루엣의 따뜻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먼저 포근하게 품어 안는 나무입니다. 잎과 줄기가 대나무를 닮았다고 하여 옛 문헌에서는 ‘남천죽(南天竹)’이라 부르며, 집안에 좋은 기운을 불러들이는 상서로운 영물로 대접받아 왔지요.
가정의 평안을 지키는 가업나무, 옛 선조들은 집안의 장독대 옆이나 마당 한구석에 남천을 꼭 심었습니다. 남천이 가진 붉은 빛깔이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가족들에게 행운과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척박한 겨울날에도 마당을 지키며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해 주던 고마운 파수꾼이었던 셈입니다.
삶의 기침을 다스리는 치유의 붉은 알갱이, 남천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입니다. 늦가을부터 겨울내 달리는 붉은 열매는 한방에서 '남천실(南天實)'이라 부르며, 지독한 기침을 가라앉히고 천식을 다스리는 귀한 약재로 썼습니다. 매서운 바람에 몸과 마음이 상한 이들을 소리 없이 치료해 주는 다정한 자연의 처방전입니다.
가장 빛나는 겨울의 이정표: 만물이 생기를 잃고 잠드는 겨울, 남천은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붉은 왕관을 드러냅니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세상이 아무리 얼어붙어도 당신 마음속의 온기만큼은 잃지 마세요"라고 우리를 나직이 위로하는 듯합니다.
‘추울수록 더 뜨겁게 불타오른다’ 남천의 생존 미학
남천은 왜 다른 활엽수들처럼 추운 겨울에 잎을 모두 떨어뜨려 버리지 않고, 오히려 온몸을 붉게 물들인 채 겨울 한복판을 정면으로 돌파할까요? 여기에는 척박한 추위 속에서도 자신만의 생명을 당당하게 이어가기 위한 남천만의 영리하고 단단한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추위를 열정으로 바꾸는 안토시아닌의 지혜, 겨울철 기온이 뚝 떨어지면 남천은 초록색 광합성을 멈추고 잎 속에 붉은색 색소인 '안토시아닌'을 가득 채워 넣습니다. 이 붉은 색소는 식물의 세포가 얼어붙지 않도록 도와주는 천연 부동액 역할을 하지요. 추위에 굴복해 잎을 비워내기보다, 주어진 시련을 자신만의 화려한 옷으로 바꾸어 입는 놀라운 유연함입니다.
새들과의 상생을 위한 겨울의 유혹, 가을에 맺힌 남천의 열매는 한겨울이 되어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가지 끝에 단단히 매달려 있습니다. 먹이가 부족한 겨울철, 숲속의 굶주린 새들에게 눈에 잘 띄는 붉은 보석 같은 양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새들에게 아낌없이 먹이를 내어주고, 자신은 씨앗을 멀리 퍼뜨리는 영리하고 따뜻한 공존의 생존법입니다.

기다림 끝에 만나는 ‘겨울날의 기적’
남천은 만물이 푸른 봄과 여름에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초록 풀숲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숨을 죽이고 몸을 웅크리는 거친 겨울이 오면, 세상 그 어느 나무보다 당당하게 붉은빛 함성을 터뜨리며 겨울 정원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거듭납니다.
모진 눈보라에 온몸을 흔들면서도 보석 같은 열매를 지켜내며, “삶의 겨울이 찾아와 사방이 얼어붙은 것처럼 막막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세요. 가장 추운 날 당신이 피워낼 인내의 빛깔은 그 무엇보다 눈부시고 따뜻할 테니까요”라고 우리를 나직이 격려하는 듯합니다.
남천의 꽃말은 ‘좋은 가정, 전화위복(화가 바뀌어 복이 됨)’입니다.
가장 척박한 계절에 홀로 가장 뜨거운 빛을 발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남천처럼,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단한 시련들도 결국 우리 내면을 더욱 흔들림 없고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일 것입니다. 지금 혹시 마음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거친 겨울 같은 현실에 마주하고 계신가요?
모진 추위 속에서도 기어이 눈부신 붉은 열정을 지켜내는 남천처럼, 여러분의 묵묵한 인내와 노력도 조만간 시련을 뚫고 지나 세상에서 가장 값진 행운과 결실로 피어나기를 온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대전 도안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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