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이야기

여름 숲을 깨우는 붉은 함성, 나리가 가르쳐 준 당당한 비상

이모 저모 2026. 6. 30. 20:38

이정태 숲해설가가 읽어주는 ‘자연의 지혜’

여름 숲을 깨우는 붉은 함성, 나리가 가르쳐 준 당당한 비상

봄날의 냉이와 달래가 지나간 자리에 싱그러운 초록이 우거지고, 대지가 본격적인 여름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찰 때, 깊은 숲속 한가운데나 거친 절벽 끝에서 주위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강렬한 주황빛 꽃송이를 터뜨리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나리입니다.

우리가 흔히 ‘백합’이라는 서양식 이름으로 더 잘 알고 있는 나리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땅의 산과 들을 지켜온 자랑스러운 우리 고유의 들꽃이지요. 오늘은 타오르는 태양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화려한 당당함을 뽐내는 나리의 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초록빛이 짙은 한여름 산자락이나 바위틈 사이로 붉은 주황빛 나리꽃

눈보다 마음으로 먼저 품어 안는 ‘기개(氣槪)’의 신비

나리는 눈으로 선명하게 마주하기 전에 짙은 초록빛 수풀 사이로 번져오는 강렬한 주황빛의 생동감으로 우리의 마음을 먼저 뜨겁게 품어 안는 꽃입니다. 가녀리고 가냘픈 여느 봄꽃들과 달리, 한여름의 한복판에서 대지의 넘치는 에너지를 아낌없이 분출하는 대범한 성정을 가졌지요.

 

우리 땅의 자존심, 토종 나리, 숲해설을 하며 만나는 우리 나리들은 저마다 개성이 넘칩니다. 꽃이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나리', 땅을 바라보고 수줍게 피면 '땅나리', 옆을 보면 '말나리', 그리고 호랑이 무늬처럼 검은 점이 콕콕 박힌 거대한 '털중나리'와 '참나리'까지, 저마다의 위치에서 숲을 빛내는 아름다운 가족들입니다.

 

백 개의 달걀을 품은 뿌리, 백합(百合), 우리가 백합을 흰 백(白) 자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일백 백(百) 자에 합할 합(合) 자를 씁니다. 나리의 알뿌리를 캐보면 마치 마늘쪽처럼 생긴 수많은 비늘줄기가 겹겹이, 백 개나 단단하게 합쳐져 있기 때문이지요. 겉모습의 화려함은 결국 땅속에서 묵묵히 서로를 감싸 안은 단단한 연대의 힘에서 나옵니다.

 

삶을 살찌우던 구황 식물, 예로부터 나리의 단단한 알뿌리는 녹말과 영양분이 풍부하여 배고픈 시절 백성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던 고마운 구황 식물이기도 했습니다. 소나무가 껍질을 내어주고 질경이가 약이 되었듯, 나리 역시 화려한 꽃을 피우기 전에 인간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던 다정한 생명입니다.

'당당함과 열정' 뒤로 활짝 젖혀진 꽃잎과 그 안에 콕콕 박힌 검은 반점, 그리고 길게 뻗어 나온 암술과 수술을 생생함

‘태양을 향해 온몸을 펼친다’ 나리의 생존 미학

나리는 왜 다른 식물들이 더위를 피해 그늘로 숨어들 때, 굳이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을 선택해 이토록 화려하고 커다란 꽃을 피워낼까요? 여기에는 거친 여름 숲의 경쟁 속에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나리만의 치밀하고 단단한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하늘을 향한 정직한 정공법, 나리의 꽃잎은 활짝 뒤로 젖혀지며 암술과 수술을 세상 밖으로 당당하게 드러냅니다. 강렬한 주황색 바탕에 검은색 반점을 새겨 넣어, 멀리서 날아가는 호랑나비와 벌들에게 "여기 가장 달콤한 꿀이 있으니 어서 오세요" 하고 확실한 이정표를 제시하는 영리한 유혹의 기술입니다.

 

겨드랑이에 품은 작은 생명, 씨앗 가기(주아), 참나리 같은 녀석들은 꽃을 피우는 것 외에도 잎겨드랑이에 까맣고 동글동글한 '주아(씨눈)'를 매달아 둡니다. 이 주아가 땅에 떨어지면 부모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라나지요. 혹시 모를 기후 변화나 시련으로 꽃이 씨앗을 맺지 못할 때를 대비해, 온몸에 제2의 생명 주머니를 준비해 두는 철저하고 빈틈없는 생존법입니다.

기다림 끝에 완성되는 ‘찬란한 독무’

나리는 가을과 겨울, 그리고 따스한 봄날이 지나갈 때까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단단한 알뿌리 상태로 흙 속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더위에 지쳐가는 한여름이 오면, 기어이 줄기를 당당하게 뻗어 올려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주황빛 독무를 시작합니다.

 

거센 여름 소나기와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주변 환경이 아무리 거칠고 뜨거울지라도 웅크리지 마세요. 가슴속 깊은 곳에 단단한 내실을 품고 있다면, 당신이 피워낼 생의 순간은 그 누구보다 강렬하고 찬란할 테니까요”라고 우리를 나직이 위로하는 듯합니다.

 

나리에게 어울리는 상징은 ‘당당함, 결속, 기적 같은 열정’입니다.

흙 속에서 백 개의 비늘을 단단하게 맞잡고 버텨내어, 가장 뜨거운 날 가장 화려한 왕관을 쓰는 나리처럼, 우리 삶을 가로막는 크고 작은 시련들과 오랜 기다림의 시간도 결국 우리 인생에서 가장 눈부신 비상을 준비하는 소중한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지금 혹시 남들의 화려함에 가려져 나만의 때를 기다리며 고단한 일상 속에서 숨을 죽이고 계신가요?

 

거친 풀숲을 뚫고 일어나 기어이 푸른 하늘을 향해 가장 당당한 주황빛 날개를 펼쳐 보이는 나리처럼, 여러분의 묵묵한 인내와 성실함도 조만간 단단한 현실을 깨우고 눈부신 희망의 비상을 이뤄낼 것입니다.

 

대전 도안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