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태 숲해설가가 읽어주는 ‘자연의 지혜’
수억 년을 홀로 걸어온 황금빛 거목, 은행나무가 가르쳐 준 ‘우직한 공존의 깊이’
봄날의 복수초와 봄까치꽃이 낮은 땅에서 작은 미소로 새봄을 깨우고, 여름날 곤충들이 치열하게 생명의 노래를 부른 뒤, 이윽고 대지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결실의 계절을 완성할 때,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로 우뚝 서서 숲의 역사 그 자체를 증명하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은행나무입니다.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경이로운 수식어답게 은행나무는 공룡이 대지를 누비던 쥐라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화의 대를 끊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켜온 위대한 생명의 목격자이지요. 가을이 깊어지면 온 세상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황금빛 잎사귀 속에, 자연의 거대한 순환을 품어 안은 은행나무의 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눈보다 마음으로 먼저 품어 안는 ‘영원(永遠)’의 신비
은행나무는 그 화려한 황금빛 드레스를 눈으로 마주하기 전에, 수백 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웅장한 실루엣과 그 아래 서면 느껴지는 깊은 정적만으로 우리의 고단한 마음을 먼저 따뜻하게 품어 안는 다정한 어른입니다. 화려하게 피었다가 이내 지고 마는 봄꽃들과 달리, 계절의 무게를 온전히 버텨내며 인간의 마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역사를 함께 살아내지요.
할아버지가 심고 손자가 거두는 나무, 공손수(公孫樹), 예로부터 은행나무는 씨앗을 심으면 할아버지(公) 대에 심어 손자(孫) 대에 이르러야 비로소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공손수’라 불렸습니다. 조급하게 성과를 바라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해 묵묵히 그늘을 넓히고 부를 축적하는 선조들의 숭고한 헌신과 내실을 닮은 정겨운 이름입니다.
스스로를 지켜내는 고결한 향기, 은행나무 열매에서 나는 특유의 큼큼한 냄새는 사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영리한 방어벽입니다. 겉껍질에 포함된 ‘빌로볼’과 ‘은행산’ 성분은 곤충이나 동물이 열매를 함부로 갉아먹지 못하게 막아주며, 나무 전체에 병충해가 범접하지 못하도록 숲을 정화하는 천연 파수꾼 역할을 합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이정표: 소나무가 높은 능선에서 우직한 겨울의 절개를 보여준다면, 은행나무는 마을 어귀나 서원 마당에 서서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르고 풍파가 몰아칠지라도, 내 안의 중심을 굳건히 잡고 있다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자연의 약속을 몸소 실천해 보입니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독종이 되다’ 은행나무의 생존 미학
은행나무는 왜 다른 나무들처럼 바람에 쉽게 씨앗을 날려보내거나 화려한 꽃으로 꿀벌을 유혹하지 않고, 지구상에 오직 단 1과 1속 1종만이 존재하는 외로운 생존자가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모진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나만의 가치와 단단함을 유지하려는 은행나무만의 치밀하고 경이로운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외풍을 견뎌내는 방화벽의 지혜, 은행나무는 줄기와 잎에 수분을 다량 머금고 있어 불에 잘 타지 않는 대표적인 ‘방화수(防火樹)’입니다. 산불이 나도 쉽게 타지 않고 이웃 나무들로 번지는 불길을 온몸으로 막아주지요. 거칠고 위험한 현실 앞에서 나를 단단히 무장하여 주변을 보호하는 상생의 미학입니다.
시간을 이겨내는 부채꼴의 유연함, 은행나무의 잎은 가운데가 갈라진 정겨운 부채꼴 모양입니다. 이 잎사귀들은 여름날의 세찬 폭우와 가을날의 거센 강풍을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바람의 결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며 날개를 지치듯 충격을 흘려보냅니다. 강한 바람 앞에서도 줄기가 부러지지 않는 유연한 생존법입니다.
기다림 끝에 비상하는 ‘황금빛 낙엽의 축제’
많은 사람이 은행나무를 도심의 흔한 가로수로만 기억하지만, 은행나무는 가을의 끝자락이 되면 단 하루 이틀 사이에 온 잎사귀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는, 이내 미련 없이 대지 위로 쏟아내며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황금빛 카펫을 깔아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화려함을 내려놓고 겨울이라는 차가운 침묵의 시간을 준비하는 숭고한 결단입니다.
아름다운 잎새를 대지 위로 나부끼며, “삶의 여정이 아무리 길고 지치더라도 조급해하지 마세요. 나만의 속도로 내면의 깊이를 채워가며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면, 당신의 인생 또한 머지않아 수많은 사람에게 거대한 그늘과 함께 찬란한 황금빛 위로를 선물하게 될 테니까요”라고 우리를 나직이 다독이는 듯합니다.
은행나무의 상징은 ‘장수, 침묵의 내공, 그리고 시대를 이겨내는 강인함’입니다.
차가운 겨울이 다가오기 전 어김없이 온 세상을 황금빛 희망으로 채우고 기꺼이 비워내는 은행나무처럼, 우리 삶을 가로막는 기나긴 인내와 외로운 기다림의 시간들도 결국은 가장 나다운 가치, 가장 찬란한 성공의 결실을 맺기 위한 소중한 여정일 것입니다. 지금 혹시 거친 비바람이 몰아치는 세상 속에서 홀로 뿌리를 지탱하며 외로운 계절을 버텨내고 계신가요?
수억 년의 세월을 건너와 기어이 정겨운 마을 어귀에 푸른 그늘과 황금빛 희망을 꽃피우는 은행나무처럼, 여러분의 묵묵한 인내와 성실함도 조만간 단단한 현실을 깨우고 찬란한인생의 가을날을 활짝 열어갈 것입니다.
대전 도안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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