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태 숲해설가가 읽어주는 ‘자연의 지혜’
사방으로 펼친 다정한 품, 느티나무가 가르쳐 준 ‘포용과 상생의 그늘’
봄날의 복수초와 봄까치꽃이 지나간 자리에 여름의 곤충들이 치열하게 생명의 노래를 부르고, 백합나무와 카나리아우드가 저마다의 곧은 기상과 아름다운 내실을 뽐낼 때, 마을의 가장 낮은 길목에 우뚝 서서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차별 없이 품어 안는 숲과 마을의 진정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바로 느티나무입니다.
"정자나무의 제왕"이라는 정겨운 별명답게 느티나무는 우리 선조들의 삶과 애환이 서린 고향 동산의 상징이자, 수백 년의 세월을 묵묵히 버텨온 위대한 생명의 산증인이지요. 오늘은 넓고 다정한 가지를 사방으로 지쳐 열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안식처를 선물하는 느티나무의 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눈보다 마음으로 먼저 품어 안는 ‘포용(包容)’의 신비
느티나무는 오월의 푸른 기운이나 가을날의 붉은 단풍을 눈으로 마주하기 전에, 수많은 가지를 사방으로 넓게 펼친 웅장한 자태와 그 아래 서면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만으로 우리의 고단한 마음을 먼저 다정하게 품어 안는 다정한 이웃입니다. 하늘을 향해 곧게만 자라는 다른 거목들과 달리, 느티나무는 옆으로, 또 아래로 가지를 뻗어 땅 위의 모든 생명을 포근하게 감싸 안지요.
마을의 안녕을 지키는 신령스러운 나무, 괴목(槐木), 옛 선조들은 느티나무를 ‘괴목’이라 부르며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당나무나 정자나무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소나무가 높은 산 정상에서 고고한 절개를 보여주었다면, 느티나무는 인간의 가 장 가까운 터전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상생의 역사를 묵묵히 기록해 온 셈입니다.
차별 없이 내어주는 다정한 정자, 느티나무 아래 마련된 평상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고, 노인과 아이의 구분이 없습니다. 땀 흘려 일하던 농부에게는 시원한 오아시스가 되어주고, 놀러 나온 아이들에게는 정겨운 놀이터가 되어주지요. 조건 없이 자신의 온 그늘을 내어주는 대자연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헌신을 닮았습니다.
세월이 빚어낸 웅장한 이정표, 참새와 제비가 하늘을 오가는 일상의 이정표라면, 마을 어귀의 늙은 느티나무는 고향을 떠난 이들이 다시 돌아올 때 가장 먼저 맞이해 주는 마음의 고향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할지라도, 나는 이 자리에서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자연의 약속을 온몸으로 실천해 보입니다.
‘가지를 넓혀 바람과 함께 춤춘다’ 느티나무의 생존 미학
느티나무는 왜 다른 나무들처럼 한 줄기로만 곧게 솟구치지 않고, 굳이 지상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아 줄기를 수십, 수백 갈래로 넓게 갈라치며 거대한 우산 모양(역원추형)의 수형을 완성했을까요? 여기에는 거센 자연의 비바람을 유연하게 받아넘기며 주변 생태계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려는 느티나무만의 치밀하고 단단한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바람을 나누어 품는 가지의 지혜, 느티나무의 거대한 수형은 한여름의 태풍이 몰아칠 때 자칫 거대한 돛처럼 작용해 뿌리째 뽑힐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느티나무는 거대한 줄기 하나로 바람을 맞서지 않고, 수많은 잔가지로 바람의 경로를 쪼개고 분산시킵니다. 거친 현실의 압박을 유연하게 받아넘기는 조화와 분산의 미학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억세어지는 비단결 속살, 느티나무의 목재는 결이 아름답고 단단하면서도 잘 썩지 않아 ‘나무의 황제’로 대접받습니다. 특히 오래된 정자나무의 심재는 붉은빛을 띠며 단단함이 극에 달해, 궁궐의 기둥이나 절의 일주문을 만드는 최고의 자재가 되지지요. 겉으로는 부드러운 그늘을 내어주면서도, 속으로는 누구보다 단단한 내실을 다져온 외유내강의 생존법입니다.
기다림 끝에 완성되는 ‘오색 빛깔 단풍의 비상’
많은 사람이 느티나무를 그저 여름날의 정자나무로만 기억하지만, 가을이 깊어지면 느티나무는 숲속 그 어떤 나무보다 다채롭고 오색찬란한 단풍을 피워냅니다. 어떤 가지는 노랗게, 어떤 가지는 붉게, 또 어떤 가지는 갈색으로 물들며 대지 위로 낙엽을 날개를 지치듯 가볍게 휘날리지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완성해 내는 숭고한 결실인 셈입니다.
마을 길목에서 거대한 초록 우산을 펼쳐 들고 우리를 맞이하며, “남들처럼 빨리 높이 올라가지 못했다고 조급해하지 마세요. 옆으로 가지를 넓히고 주변을 다정하게 품어 안는 느티나무처럼, 내 안의 포용력을 키우고 묵묵히 실력을 축적해 간다면, 머지않아 당신의 삶 또한 수많은 사람에게 가장 시원하고 포근한 안식처를 선물하는 위대한 거목이 될 테니까요”라고 우리를 나직이 위로하는 듯합니다.
느티나무의 상징은 ‘포용과 상생, 흔들리지 않는 내공, 그리고 다정한 헌신’입니다.
화려한 꽃밭처럼 순간의 아름다움을 뽐내진 못해도, 거친 비바람 속에서 스스로 몸을 굳히고 결국 세상에서 가장 웅장한 그늘을 완성해 내는 느티나무처럼, 우리 삶에 찾아오는 무겁고 고단한 책임감과 외로운 침묵의 시간도 결국 우리 인격을 더욱 깊고 기품 있게 다져가는 소중한 축적의 과정일 것입니다. 지금 혹시 나를 알아주는 이 없는 캄캄한 현실 속에서 홀로 뿌리를 지탱하며 외로운 계절을 버텨내고 계신가요?
단단한 침묵의 벽을 깨고 일어나 기어이 고향 마을 어귀에 가장 당당하고 포근한 그늘을 지쳐 나가는 느티나무처럼, 여러분의 묵묵한 인내와 성실함도 조만간 단단한 현실을 깨우고 주변을 환하게 보듬어 안을 눈부신 결실을 이뤄낼 것입니다.
대전 도안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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